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생활정보

죄책의 시기, 바이러스 포비아..

by 디플리 2020. 3. 22.

 

우리나라만 유독 괴롭다 했던 시기가 짧게 지나고, 이제는 전세계가 바이러스로 고통받고 있다. 우리는 이제 뒷줄로 밀려났고, 유럽, 미주 가릴 것 없이 융단 폭격을 맞는듯 질병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다. 

 

이렇게 무기력해 보이는 인류는 내게 처음이다. 

어떤 어려움, 환난도 국가 단위 기관, 세계기관이 나서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.

실상 내 옆에 바이러스 환자는 아직 없지만, 아침에 눈을 뜨면 수천명이 사망했다는 뉴스에 소름이 돋는다. 어제 600 여 명, 오늘 700 여 명으로 연일 일 사망자 수를 갱신하고 있는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참담할 수밖에..

 

내가 하는 많은 일들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고, 나아가 죄책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. 그 감정이 아주 지독하다.

실제 사태로 인해 받는 경제적 타격도 어마어마하지만 심적인 아픔은 그보다 크다. 

 

 

막막함. 비단 내 주변의 사람들만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외국의 소식마저 강렬하게 내 맘을 찌른다. 언제나 해결될까를 기다리다가도,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유럽, 미주 국가들의 난이 지나갈 때쯤이면, 개발도상국가, 가난한 나라들의 바이러스 러시가 이어질 거란 생각에 힘이 풀린다.

 

엊그제 미얀마 주재원으로 가 있는 지인이 하는 말이, 미얀마 정부는 자신들을 청정지역이라고 자랑스럽게 발표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 소식을 믿지 않는다는 얘기였다. 그 소식을 들으면서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. 그들은 실상 진단해 낼 수 있는 키트가 전무하기 때문에 확진자를 가려내지 못할 뿐이라는 것. 의료체계가 되어 있지 않은 나라들은 조금 더 후에 이 공포에 휩쓸리게 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. 

 

덕분에 내가 가치있다고 여기며 해왔던 일들도 덩달아 그 의미가 바래지고 있는 듯 느껴진다. 내가 그림을 그리고, 노래를 부르고, 무엇을 하든 그것이 아파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에 어떤 구제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감으로 다가온다. 이 사태를 돕는 무엇이 아니고서는 의미없게 느껴진다.

 

아울러 이 터널이 생각보다도 훨씬 길거라 생각에 두통에 시달린다.

 

 

 

사진 출처 - 네이버 영화

 

 

영화 동주를 통해 살짝 공감해 봤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비교될 순 없지만 살짝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.

 

난중에 시를 사랑하고 짓는다는 게 죄책감이고 괴로움이었던 그 고백이 떠올랐다. 윤 시인만큼의 대작을 남기며 살아가는 사람이야 흔치 않겠지만, 누구든 괴로움 중에도 살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열심을 내고 있고, 자신의 일을 해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닿았다.

 

우울하게 만드는 바이러스, 죄책의 시기면서도, 쇠약해진 마음으로도 한 걸음 내딛는 것을 포기치 않는 굳셈을 경험해야하는 시기라는 생각이다. 불가피한 죄책으로 얼룩진 파도에 휩쓸려 되는대로 밀려가는 것은 어떠한 경험도 하지 못할 것이다. 나 스스로에게 '일단 걷자'라는 주문을 계속해서 걸어본다.